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비발디 (문단 편집) === 말년의 비발디 === 이처럼 투자 실패로 경제적으로 궁핍에 빠진 비발디는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[[카를 6세]]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, 다행히 카를 6세는 비발디에게 빈에 오면 황실 음악가로 받아주고 빈에서 오페라 공연을 주선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. 희망을 얻은 비발디는 최대한 빨리 빈에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간 비싸게 팔았던 자신의 명품 악보(..)를 상당히 싼값에 팔아넘겼다. 이렇게 돈을 마련한 후 비발디는 서둘러 빈으로 출발했다. 하지만 그가 빈에 도착했을 때 카를 6세는 위독한 상황이었고 그가 도착한 직후에 사망하고 말았다. 게다가 카를 6세가 죽자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이 벌어지면서 빈의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졌고 카를 6세의 후계자인 [[마리아 테레지아]]는 빈과 지척인 [[헝가리 왕국]]의 [[브라티슬라바|프레스부르크]]로 피신해 버렸다(..)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발디의 처우 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빈의 모든 공연장은 무기한 문을 닫았다. 실의에 빠진 비발디는 결국 지병이었던 [[천식]]이 악화되면서 빈에서 객사하고 말았다. 향년 63세. 음악적 능력과 나름의 사업수완으로 전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대작곡가 비발디는 말년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불운이 겹치는 바람에 이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. 그래도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나름 예우를 갖춘 장례식이 치러졌는데, 이 때 성 슈테판 대성당의 소년합창단 소속이었던 [[요제프 하이든]][* 당시 9살의 어린아이였다.]도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. 다만 결국 합창은 불러지지 않았다고.[* 음악을 포함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었는데 당시 비발디에게는 당연히 그럴 돈이 없었다.] 그의 유해는 [[모차르트]]처럼 묘지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분실된 탓에 현재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. 음악가 비발디는 사망 후 곧 잊혀졌으며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까지 20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. 20세기 초에 [[요한 제바스티안 바흐]]가 자신의 선배 비발디의 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편곡집이 발굴되면서 잊혀져 있던 비발디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